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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시계 너마저

 

‘롤오까’라는 말 혹시 들어보셨나요? 시계 마니아들이 쓰는 용어예요. 글로벌 점유율이 롤렉스, 오메가, 까르띠에 순이라는 뜻이죠. 이 서열은 꽤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불변의 공식’이었어요. 그런데 불쑥 나타나 1위를 누르고 질서를 엎어버린 브랜드가 있습니다. 

바로 ‘애플’이에요. 애플 워치가 롤렉스를 앞질렀다는 소식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아요. 이제 스위스 시계 산업 전체를 합친 것보다 애플 워치의 덩치가 커졌거든요. 물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생각은 다를 수 있어요. 제작 과정에서 고도의 수작업이 필요한 기계식 시계와 공장에서 쭉쭉 찍어낼 수 있는 애플 워치를 비교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죠. 애플 워치를 시계로 분류해야 하냐는 근본적인 질문도 있고요. 

스마트 워치의 등장으로 시계 산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잠재적 구매자를 애플에 빼앗겼을까요, 아니면 아무 타격이 없을까요? 이 역시 제각각 해석이 달라요. 시계 브랜드들은 구매자의 성향이 달라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아요. 애플 워치의 대성공은 시계 업계에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이죠. 시간을 확인하는 용도를 훌쩍 넘어선 다기능 가젯, 심지어 오차조차 없는 이 철두철미한 기기와 이제부터라도 경쟁을 시작해야 할까요? 어떤 브랜드는 오히려 더 복잡한 기계식 시계를 개발하는가 하면 몇몇 브랜드는 자신들의 시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 시계를 ‘예술 작품화’하려고 하죠. 이러한 시도의 원인이 전부 스마트 워치에 있다고 할 순 없지만, 시기가 묘하게 겹치긴 합니다. 위블로, 콘스탄틴 샤이킨, 태그호이어, 불가리, 타이맥스. 다섯 브랜드가 떠올린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을까요? 최근 내놓은 제품을 훑어보니 공통 키워드가 하나 보이네요. 바로 디지털 아트 NFT.


 

위블로는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 중에서 특히 실험적인 상품 개발을 자주 해요. 희귀한 특수 소재를 사용하고, 페라리 엔진 모양을 본뜬 시계를 개발하기도 했어요. 최근 들어선 한 아티스트와 유난히 밀접한 관계를 이어 나가는 중입니다. ‘협업 장인’ 무라카미 다카시죠. 이번에도 그와 함께한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어요. 벌써 네 번째네요. ‘카이카이 키키’라고 불리는 다카시의 꽃을 루비, 자수정, 사파이어 등으로 장식했어요. 손동작에 따라 보석 박힌 꽃잎이 빙글빙글 도는 귀여운 퍼포먼스까지 펼치죠. 가격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쉽게도 돈이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전부터 위블로의 NFT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에게만 이 시계를 살 기회가 주어지죠. 위블로가 무라카미 다카시와 세 번째로 협업하면서 발행한 324개의 NFT 중 1개 이상을 보유하고 있고, 이번에 민팅한 NFT 13개 중 12개를 수집한 사람만 구매할 수 있어요. 위블로 마스터피스의 마지막 퍼즐은 보석 꽃이 방긋방긋 웃고 있는 이 시계라는 의미겠죠.

 

 

이거 시계 맞습니다. 그것도 무려 천만원이라는 가격에 나온 모델이에요. 이름처럼 조커의 얼굴이지만, 잘 보면 시계가 갖춰야 할 건 다 갖추고 있어요. 왼쪽 눈이 시간, 오른쪽 눈이 분을 나타내요. 빨간 혀는 하루 단위로 움직이며 달의 위상을 나타내는 ‘문페이즈’ 기능이고요. 눈알이 핑핑 도는 이 기괴한 시계는 콘스탄틴 샤이킨이라는 브랜드의 제품이에요. 역사가 매우 짧지만, ‘조커’가 큰 관심을 받은 덕에 ‘할리퀸’과 ‘드라큘라’처럼 보고만 있어도 현기증 날 듯한 시계를 연이어 만들었죠. 조커는 지금 리테일가보다 3~4배의 가격에 리셀되고 있어요. 전에 없던 장르를 개척한 모델인 데다 99개만 한정 생산되어 가격이 비현실적으로 뛰어버렸거든요. 하지만 수요가 많다고 공급을 늘리면 희소성은 곧 떨어지고 말겠죠. 2021년, 콘스탄틴 샤이킨은 시계를 추가 생산하는 대신 다른 이벤트를 벌였어요. ‘NFT-조커 프로젝트’였죠. 양쪽 눈알의 위치를 모두 다르게 배열해 4만2천4백80개의 디지털 아트 NFT로 만들었어요. 살지 말지도 고민이었겠지만, 또 다른 결정 장애가 뒤따랐을 것 같아요. 과연 몇 시 몇 분을 가리키는 조커의 얼굴이 가장 매력적이었을까요?

 

 

태그호이어는 스마트 워치를 생산하는 보기 드문 시계 전문 브랜드예요. 몇몇 제조사가 애플 워치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단종시키는 동안에도 태그호이어만큼은 꾸준하게 신제품을 선보였어요. 하지만 스마트 워치를 처음 발표했을 때 반응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어요. 특히 시계 팬들은 160년 넘은 브랜드가 애플 같은 IT기업을 따라가려 한다며 궁시렁거렸죠. 기능과 디자인을 떠나 애플 워치보다 몇 배는 비싼 가격도 그 이유 중 하나였고요. 부정적인 반응을 의식했는지 태그호이어는 개성과 성능을 점점 업그레이드했어요. 특히 지난해엔 NFT를 시계 배경 화면으로 띄울 수 있는 ‘커넥티드 칼리버 E4’를 출시했습니다. 워치와 연동되는 태그호이어 앱을 통해 디지털 지갑에 있는 작품을 고르기만 하면 배경을 손쉽게 바꿀 수 있도록 해두었죠. 애플도 이를 보고 잽싸게 유사한 기능을 추가했지만, 태그호이어가 이 구역의 개척자인 것은 분명해요. 새롭게 도입된 기능 덕분에 판매량이 기적처럼 치솟을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IT기업을 흉내내려 한다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아도 되겠어요.

 

 

불가리 옥토는 참 사연 많은 시계예요. 오데마피게의 로얄오크, 파텍필립의 노틸러스를 만든 전설적인 시계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의 유작이거든요. 원을 둘러싼 팔각형은 젠타의 시그니처 디자인이었는데, 숫자 8을 뜻하는 옥토는 그 이름에서부터 창조자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있어요. 옥토 시리즈 중 지난해 출시된 ‘피니시모 울트라’는 세상에서 가장 얇은 기계식 시계로 이름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복잡한 내부 구조상 두꺼울 수밖에 없지만, 총 두께 1.8밀리미터라는 믿기 어려운 기록을 세웠어요. 물론 리차드 밀이 0.05밀리미터를 더 줄이는 바람에 1위 자리를 내주긴 했어도 놀라운 성과인 건 분명하죠. 게다가 불가리는 지난 10여 년 동안 거의 매해 시계 두께 기록을 갱신하면서 독주했어요. 이 시계엔 이스터 에그처럼 재미있는 요소도 숨겨져 있답니다. 기계식 시계의 동력원인 메인 스프링을 담는 통 ‘배럴’ 에 QR 코드를 새겨두었거든요. 스마트폰이 코드를 인식하면 불가리가 꾸민 메타버스로 연결돼요. 작고 좁은 시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부품을 자세히 살펴볼 수도 있어요. 옥토를 소재로 제작한 NFT 영상도 이 QR 코드를 통해 재생하고요.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기발하지 않나요. 기계식 시계라는 오래된 양식을 매개로 메타버스에 도달하는 경험을 선사하고 있잖아요. 딱 10개만 제작된 옥토 피니시모 울트라의 가격은 약 5억 3천만원. 기획, 디자인, 기술력, 그리고 가격까지 모두 아트 그 자체라고 인정합니다.

 

 

미국의 시계 제조사 타이맥스는 고가의 제품을 만드는 브랜드는 아니에요. 굳이 비유하자면 ‘미국의 카시오’ 정도가 적절하겠네요. 보통 10만원 이하의 시계를 만들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 4백만원이 넘는 시계를 발표했어요. 모두 화들짝 놀랐죠. 특히 미국에선 국민 브랜드의 배신이라며 황당해했어요. ‘비브라늄’으로라도 만들었냐고요? 물론 아니에요. 소재나 핵심 부품 등이 기존 타이맥스 제품과 크게 다를 바도 없어요. 대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원숭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디지털 아트 NFT인 BAYC(Bored Ape Yacht Club)와 MACY(Mutant Ape Yacht Club)말이에요. 타이맥스는 두 작품의 홀더에 한해 세상에서 하나뿐인 시계를 주문 제작을 받기로 했어요. 자신이 소유한 작품으로 다이얼을 꾸미고, 시계의 형태, 줄, 뒷면에 새길 문구 등을 선택할 수 있죠. 생산량도 사전에 정했답니다. 딱 5백 건의 주문을 받는다고 해요.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 엄밀히 말하면 시계 판매가 전부는 아니에요. 타이맥스에서 2ETH(이더리움)에 민팅한 NFT를 구입하면 실물 시계를 ‘덤’처럼 주는 모양새죠. NFT로 실물 시계의 정품 여부를 인증할 수도 있고요. 타이맥스는 자신들의 첫 번째 NFT 작품이라면서 ‘Non-Fungible Timex’라고 홍보하고 있어요. NFT에서 ’Token’을 뜻하는 'T'를 브랜드명으로 슬쩍 바꿔버렸죠. 대체 불가능한 타이맥스. 만약 BAYC 홀더라면 구매하시겠어요?

에디터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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