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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들의 시시콜콜한 ‘썰’-EP 04
어떤 아티스트는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삶을 살았어요. 사적인 경험은 세상에 대한 관점으로 자리 잡고, 작업에도 반영되곤 하죠. 작품에 담긴 보너스 트랙. 작가들의 10가지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TIP 커피 한잔하면서 여유롭게 읽으면 더 재미있을 거예요.

01
SANDRO BOTTICELLI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가 ‘비너스와 마르스’를 그린 목적으로 여러 추측이 있어요.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피렌체의 명문가 메디치 가문의 혼수였다는 주장이죠. 교육용 도서에선 미의 여신 앞에서 무장을 해제한 채 잠든 전쟁의 신 마르스를 두고 ‘사랑은 무력을 이긴다’라는 해설을 곁들이곤 합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글쎄요. 너무 착한 해석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스·로마 신화와 대조하면 이 장면은 분명 비너스가 남편 불카누스 몰래 마르스를 만난 불륜 현장입니다. 일은 이미 벌어진 후죠. 사랑을 나눈 후 옷도 못 입고 곯아떨어진 상대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비너스. 숲의 정령 사티로스들은 무기와 갑옷을 갖고 노는가 하면, 마르스 귀에 대고 신나게 고둥을 불어댑니다. 그는 물론 세상모르고 늘어져 있지만요. 혼수품이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신혼방에 걸렸을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새신랑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쿠흘바우어 탑’ / 이미지 출처: Adobe Stock
02
HENRI ROUSSEAU
앙리 루소는 성실한 ‘투잡맨’이었어요. 자원입대한 군악대에서 복무한 뒤 파리 세관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약 50세가 될 때까지 일과 작품 활동을 꾸준히 병행했어요. 본격적인 전업 화가가 된 시점은 그 이후.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고 ‘원근법도 모르는 삼류’라며 평론가와 화가들로부터 조롱당했지만, 오늘날의 평가를 생각하면 결국 그가 승자 아니었을까요.
03
FRIEDENSREICH HUNDERTWASSER
오스트리아 건축가이자 화가였던 훈데르트바서의 이름 뜻은 ‘1백의 물’이에요. 이름처럼 평화롭고, 환경을 배려하는 세상을 꿈꾼 예술가였죠.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처럼 곧게 뻗은 선을 배제한 설계로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건축물을 여럿 지었습니다. ‘우리 모두 자연에 잠시 들린 손님’이라는 평소 생각과도 일맥상통하는 작업이었죠. 21세기의 목전이었던 2000년, 작가는 태평양을 항해하던 중 배 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이름처럼 수많은 물 위에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손님처럼 조용히 세상에 작별을 고했어요.

04
MARINA ABRAMOVIC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에게 울라이(우베 라이지펜)는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였어요. 젊은 시절부터 기발하고도 아찔한 작품을 함께한 커플이었죠. 1988년, 둘은 만리장성 양 끝점에서 출발해 중간에서 마주치곤 곧 스쳐 지나가는 퍼포먼스를 벌입니다. 마지막으로 기획한 공동 작품이자 이별 의식이었죠. 시간이 훌쩍 흐른 2010년, 마리나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The Artist Is Present>라는 작품을 선보여요. 참여자가 의자에 앉으면 마리나가 무표정으로 눈을 응시하는 행위 예술이었죠. 잠시간 눈을 감고 다음 참가자를 기다리던 마리나는 앞에 앉은 사람을 보고 눈물을 펑펑 쏟습니다. 22년 만에 울라이와 재회한 것이죠. 이 작품은 유튜브에서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됩니다. 둘의 사연이 알려지며 감동이라는 댓글이 쏟아졌죠. 하지만 ‘동화’는 딱 거기까지. 2016년 울라이는 그녀가 과거 작품 관련 수입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걸었어요. 마리나는 결국 25만유로를 지급하라는 패소 판결문을 받았습니다.

05
IVAN AIVAZOVSKY
이반 아이바좁스키는 흑해 항구 도시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인지 바다의 풍경을 주로 담아 ‘해양 화가’라는 별칭도 붙었죠. 그의 작품엔 바다에 대한 관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거대한 물살이 몰아치거나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곳.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가 요동치는 바다라는 공간을 경외의 대상으로 여긴 듯하죠. ‘아홉 번째 파도’는 난파한 배의 잔해 위에 있는 사람들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그렸어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지, 신에게 기도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손을 흔들며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죠. 그런데 이 대작의 어디를 살펴도 작가의 사인이 없는데요. 아이바좁스키의 서명은 선박 잔해에 꼭꼭 숨어있습니다. 마치 배에 새겨넣은 것처럼요. 작가는 왜 널찍한 공간을 두고 굳이 배에 이름을 새겼을까요? 그 역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선원들처럼, 하루하루 위험한 항해 중인 인간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06
OSKAR KOKOSCHKA
오스카 코코슈카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으로 대개 ‘바람의 신부’를 꼽곤 해요. 남자는 당연히 작가 자신일 테고, 여자는 그럼 누구일까요? 바로 ‘알마 말러’라는 사람입니다. 성씨가 좀 익숙하지 않나요? 그녀의 첫 남편이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였거든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문화예술계 슈퍼 셀럽들은 그녀에게 빠져 이상하리만치 허우적댔어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시인 라이너 릴케도 그녀의 연인이었죠. 바우하우스 창립자 발터 그로피우스와 문학가 프란츠 베르펠은 각각 그녀의 두 번째 세 번째 남편이었고요. 코코슈카 역시 치명적인 매력에 홀랑 반한 모양이에요. 여러 작품에 그녀를 그려 넣고,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사랑 공세를 퍼부었어요. 코코슈카의 왜곡된 애정은 연인 관계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됐어요. 그는 알바 말러를 닮은 인형을 주문 제작하기에 이르렀죠(인형의 모습이 기괴해서 기사에 싣진 않았어요. 여기를 누르면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연결돼요). 옷도 입히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던 코코슈카.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사랑이 끝났다며 인형의 목을 베고 와인병으로 마구 내리쳐 집밖에 내다 버립니다. 붉은 포도주는 피로 오해받았고, 목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어 경찰이 출동하는 사건까지 벌어집니다. 먼저 잊는 사람이 승자일까요? 코코슈카의 구질구질하고 해괴한 퍼포먼스를 비웃기라도 하듯 알마는 미국에서 85세까지 장수하며 윤택한 삶을 누립니다.

07
CASSIUS MARCELLUS COOLIDGE
제작 당시엔 아트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제 명작으로 취급받는 작품이 있어요. 미국 아티스트 카시우스 쿨리지의 ‘포커 치는 개’ 시리즈죠. 작가는 광고 회사 ‘브라운 & 비글로우로부터 시가 판촉에 활용할 그림 제작을 의뢰받아요. 개들이 삼삼오오 모여 포커나 당구를 치는 동안 담배를 맛있게 태우죠. 총 16점으로 된 작품은 1894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하나하나 완성되었어요. 위 그림은 1903년 제작된 ‘A Friend In Need’고요. 당시엔 광고 이미지에 불과했으나 대략 1백 년 후엔 귀하디귀한 대접을 받아요. 특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었던 ‘Poker Game’은 2015년 소더비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약 6억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우-작가, 제목 미상 / 이미지 출처: 논문 ‘A New Identity For Rubens’s ‘Korean Man’, Thijs Weststeijn
08
PETER PAUL RUBENS
루벤스의 작품 중엔 동양인 남자를 그린 것이 있어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 등장하는 인물의 사전 스케치라고 알려져 있죠. 그런데 그가 조선 사람, 더 정확히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납치되어 이탈리아로 팔려 간 실존 인물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통하고 있어요. 국내 한 대학 교수가 2004년 펴낸 책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에서 시작된 이야기죠. 근거는 루벤스와 안토니오 코레아가 같은 시기 로마에서 머물렀다는 기록, 그리고 남자의 옷이었죠.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소장처인 게티 미술관도 중국인으로 소개하던 인물을 조선인으로 바꿨어요. 작품명도 ‘Man In Korean Costume’으로 변경했고요. 그러나 모두 판타지에 가까운 억측이에요. 옷과 모자를 세부적으로 살피면 당대 조선 복식과 분명한 차이가 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국 상인 ‘흥포’라는 정보까지 정확하게 기록된 작가 미상의 스케치가 네덜란드에서 발견됐습니다. 루벤스의 그림과 외모, 구도, 옷 모두 거의 같죠. 즉, 루벤스는 안토니오 코레아를 만난 적이 없어요. 그저 누군가 그린 동양인을 보고 추후 자기 작품에 넣을 목적으로 연습 삼아 그려봤을 뿐이죠.

09
ANDREW WYETH
20세기에 활동한 미국 화가 앤드류 와이어스는 친구와 이웃 등 주변 사람을 모델로 그렸어요. 그의 대표작 ‘크리스티나의 세계’에 등장하는 소녀도 그의 절친한 이웃이었죠. 그런데 이 그림, 어떻게 보이나요? 바람 부는 들판에 앉은 소녀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같나요? 그녀의 사연을 알고 나면 낭만적인 한 풍경화로만 다가오진 않을 거예요. 크리스티나는 퇴행성 근육질환을 앓아 걷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휠체어를 타지 않고, 하체를 끌고 다니며 생활했다 하죠.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고요. 화가는 어린 이웃의 당당한 태도와 단단한 내면을 그림으로 남기는 게 과제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어요. 넓게 표현한 들판이 더는 평화로운 농가의 전경이 아닌, 소녀가 한 뼘 한 뼘 전진하고야 말 앞으로의 세상처럼 보입니다.

10
LEE AM
깃털을 물고 어디론가 향하는 잔망스러운 강아지. 현대적인 일러스트 같아도 무려 1500년대에 완성된 작품이에요. 작가 배경이 아주 독특합니다. 세종의 직계 4대손인 이암이라는 사람이에요. 주제가 문제였어요. 종친이 ‘양반의 그림’인 산수화나 사군자가 아닌 개를 그린다며 핀잔을 듣기도 했죠. 이암은 그래도 꿋꿋하게 좋아하는 주제를 다뤘어요. 그의 그림이 비록 조선에선 홀대받았어도 일본에선 대접이 달랐어요. 에도시대 화가들 사이에서 ‘견도’ 대유행을 일으키죠. 게다가 엉뚱하게도 이 강아지는 몇 백 년을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에도 등장합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에서 주인공 이사벨(에바 그린)의 방에 걸린 작품이 이 그림이에요. 사람 일은 역시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