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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필사 카페’에!
돈 대신 글 받아요✍️
돈 대신 손글씨 한장으로 커피를 내주는 카페가 있습니다. 최근 DDP 잔디언덕에서 이틀간 열린 천근성 작가(@geunsungc)의 ‘필사 카페’ 프로젝트인데요. 현장에 준비된 필사집*에서 글을 골라 옮겨 적은 필사본만 4백 장 넘게 쌓였어요. 사실, 돈 대신 창작물을 주고받는 작가의 ‘물물교환’ 작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관객이 쓴 시는 작가가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되기도, 즉석에서 그린 그림은 시장에서 구한 생활용품이 되기도 했죠. 천근성 작가에게 예술이란 또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 아닐까요?
*현장에 준비된 필사집: 교정 시설, 노숙인 시설, 자활 센터 대상의 인문 교육 프로그램 ‘디딤돌 인문학’ 참여자들의 손글씨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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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가·예술 컬렉티브 ‘피스오브피스’ 대표. 미술관 바깥으로 나가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 맺는 예술’을 합니다. |
🚛 ‘동대문만물미술트럭’(2025) ☕️ ‘수원역전시장’(2025) 🔨‘이웃집 홈리스’(2023) |

‘필사 카페’를 찾은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이틀 동안 커피 4백 잔과 종이 박스 조각 위에 쓴 필사 4백 편이 오갔어요. 주워 온 천막으로 지은 카페 공간은 끝날 때쯤엔 어느새 온기가 스며든 손글씨로 가득 차 있었죠. “남의 문장을 쓰는데 내 손이 떨렸다”는 한 관객의 말이 유독 기억에 남네요.

그 모습을 본 작가님의 소감이 궁금해요.
필사본을 모아놓고 보니, 작가 한 명이 혼자 만들 수 없는 수많은 관계의 힘이 느껴졌어요. ‘필사’는 단순히 글자를 베껴 쓰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에 잠시 머무는 행위라는 사실도 알게 됐죠. ‘예술’은 결과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라는 믿음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어요. 앞으로도 돈 대신 예술 노동으로 대가를 주고받는 ‘관계 예술’에 관심을 둘 거 같아요.

‘관계 예술’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신다면요? 예술에서 관계가 중요한 이유가 있나요?
예술에서 관계가 중요하다기보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관계로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고, 서로의 일과 마음을 건드리며 살아가잖아요. 관계를 맺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 제게 가장 익숙한 ‘예술’을 우연히 쓰고 있을 뿐이에요. 솔직히 저는 배려심이 아주 깊거나 특출나게 프렌들리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요. 다만, 작업을 지속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4백 편의 필사는 ‘작은 전시로 태어날 예정’이라고 인스타그램에 예고하기도 했어요.
금방 사라지도록 두기엔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구체적인 전시 장소나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곧 알려드릴게요.

그간의 작업을 보면, ‘물물교환’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같아요. 지난 10월, 특히나 화제였던 ‘동대문만물미술트럭’은 경동시장에서 구한 100가지 물건을 관객이 그린 100점의 그림과 맞바꾸는 방식이었고, 이번 ‘필사 카페’의 커피 값도 손글씨였어요. 하필 ‘물물교환’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돈은 편리하지만 감정의 결이 빠져 있어요. 하지만 물물교환은 등가교환이 아니라서 상대방의 시간과 맥락, 심지어 그날의 기분까지 생각하게 되죠. 돈 대신 그림과 글, 사연과 물건을 교환하면 서로의 삶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돼요. 그래서 관계가 더 깊어집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문득문득 선물이 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세상이 조금 더 너그러워지면 좋겠어요. 아 물론, 저부터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예술’은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
예술이 세상을 바꾸긴 어렵죠.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를 틀어볼 수는 있어요. 사람의 본성은 잘 변하지 않는다지만, 특정한 사건은 사고의 전환을 이끌죠. 예술은 그런 사건을 계속해서 만드는 장치예요. 금전이 아닌 낯선 방식의 교환, 갑자기 이젤 앞에 앉거나 4B 연필을 손에 쥐어보는 경험, 글을 필사할 때 오는 10분의 정적.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이 쌓이면 생각도 조금씩 이동해요. 내가 변하면 주변도 변해가죠. 예술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작은 분자들의 끊임없는 움직임에 가깝습니다.

(아래) 손님들의 창작물을 2025년 4월, 수원시립미술관 그룹전 <모두에게: 초콜릿, 레모네이드 그리고 파티>에서 함께 공개 ⓒb.frame
내년엔 또 어떤 작업을 펼쳐내실지 기대돼요.
확정된 건 없어요. 다만, 올해 작업 중 ‘동대문만물미술트럭’이 생각보다 더 뜨거운 반응을 얻어서 ‘팔도 유람’ 콘셉트나 ‘섬마을 만물미술트럭’처럼 확장판 버전을 상상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충청도 물건을 경상도에서 그림과 교환하고, 다시 그 그림을 전라도에 가서 전시하는 것처럼요. ‘전국 시장 미술 네트워크’가 생길 수도 있겠죠. 문제가 있다면… 트럭이 없습니다. 한 대 사려면 돈을 열심히 벌어야겠죠. 결국 내년에도 ‘돈 대신 창작물’을 주고받는 시리즈와 ‘돈 벌기’ 두 가지 활동으로 달려갈 예정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