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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위에서 찾은 회색 지대
이사라 작가는 고전 소설과 철학 이론에서 영감을 찾아요. 과거에서 시작해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야기에 의문을 던지고, 힘찬 붓터치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을 찾아갑니다. 안다즈 호텔 강남의 서울옥션엑스 전시장에 펼쳐진 작가의 자유로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인물과 배경의 경계가 흐릿한 모습이 돋보여요.
‘주인공’을 내세우는 전통적인 인식을 해체하고 싶었어요. 인물이 배경에 녹아들거나, 배경이 인물의 얼굴을 침범하며 무엇이 중심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들었죠. 강한 붓질로 표현과 추상, 회화 속 원근 등 극단에 있는 요소를 뒤섞으며 말이죠.
특별한 하나에 주목하는 대신 캔버스 전체를 고르게 살펴봐야겠어요.
그림 전반을 하나의 흔적처럼 묘사하는 건 인간도 긴 역사 속 아주 작은 획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은유해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 지대(Gray area), 중간 영역(In-between)을 탐구하는 저만의 기법이에요.
이번 전시 <The Red and The Blue>와도 이어지는 맥락처럼 보여요.
그렇죠. 시스템 안의 질서와 개인이 추구하는 자유, 논리와 직관, 현실과 환상처럼 대립 구도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는 순간에 매료됐거든요. 게다가 전시를 준비하면서 고전 문학과 철학, 프랑스 낭만주의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알베르 카뮈의 작품 <시지프 신화>,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개념 ‘에피스테메*’에서도 모티프를 얻었죠. 우리가 ‘맞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거든요. 당연한 건 없으니까요.
*에피스테메: ‘지구는 평평하다’처럼 특정 시기에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는 특별한 규칙. 당대 지식인이 쓰는 말이 대중의 무의식에 스며 들어 세상을 보는 틀이 된다.
도파민이 절로 나오는 콘텐츠가 가득한 때잖아요. 그런데도 고전 문학이나 철학에 특별히 집중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림에 사연이나 감정을 풀어내기보다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갈 거시적인 주제에 관심이 더 많아요. 책에 파묻혀 자란 터라 ‘읽는 행위’가 익숙하기도 하고요.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회화로 구현하는 과정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제가 찾은 최선은 관객이 익숙해할 만한 레퍼런스를 활용하는 거예요. 역사, 예술, 종교 등 어딘가 한 번쯤 접했을 법한 조각을 살짝 변형해서 힌트처럼 심습니다. 언어 없이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법이에요.

우: ‘Kiss Against the Others’
철학자의 이름이나 고전 문학이 낯선 관객도 전시를 즐길 수 있는 팁을 준다면요?
‘시각적 혼란’을 눈여겨보세요! 다채로운 색과 아이디어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발생하는 시각 언어를 느껴보세요. 아주 많은 양의 정보를 수집한 뒤 빈 캔버스 위에 겹치거나 옮기고 지우며 끊임없는 변주를 만들었거든요. 여러 요소 중 공통된 속성을 추출하는 ‘추상’에 대해 각자 나름의 의미를 찾아봐도 재밌을 거예요.

작업 노트는 물론, 2021년 뮤지션 장재인과 함께했던 전시 <틀 안의 우월>에 포함된 단어처럼 경계, 모순, 자유 의지, 야만 등 묵직함이 느껴지는 단어도 자주 등장해요.
이 주제를 놓고 영어권과 한국어권 친구들과 토론한 적이 있었죠. 영어에선 직관적인 단어인데, 한국어에선 깊은 뜻이 담긴 한자어라고 들었어요. 뉴욕에서 태어나 LA와 한국에서 활동하니까 양쪽에서 영향받은 흔적 같기도 해요. 이런 불확실성이나 모호함 역시 제 세계의 일부가 아닐까요?

전시장에 튼 영상 속 물감을 휘젓는 장면도 눈에 띄어요. 색을 선택할 때 기준도 있나요?
기준을 정해두지는 않아요. 다만 물감 섞는 시간을 참 좋아하는데요. 비슷한 계열의 색을 배치해 극단적으로 탁하게 만들거나 과하게 생기를 더해요. 예상될 것 같던 색이 결과물에서 볼 땐 상반된 느낌일 때 고정관념을 깨죠.
장시간 작업을 하다 보면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순간도 있을 듯 해요.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해요! 하나를 그리다 막히면 집착하지 않고 바로 다른 캔버스 앞에 섭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여러 작품도 하나의 시리즈처럼 통일감이 생겨요. 또, 일부러 제약을 만들어요. 한정된 색만 써본다든지, 캔버스를 옆으로 돌리거나 거울로 캔버스의 좌우를 뒤집어 작업하기도 하죠. 반면에 일상 루틴은 최대한 단순하게. 점심 메뉴처럼 작은 일에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림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적어도 한 사람의 시선을 붙들거나 생각을 깨운다면 좋은 작품 아닐까요?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거예요.

<The Red and The Blue> 📆 ~10. 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