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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처 아트 신의 묵직한 신인, 작가 이십칠
이십칠(@27_isibchil)은 서브컬처 아트 신에서 활동하는 작가예요. 망가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오타쿠 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경향을 작품에 반영합니다. 첫 개인전에서는 학창 시절 겪은 성적 트라우마, 퀴어 경험 등 내밀한 기억을 캔버스에 묵묵히 쌓아 올렸어요. 하지만 ‘치유’가 목적은 아니었죠. “자전적인 이야기나 어떤 트라우마를 고백하면 흔히 ‘용기 있다’는 말을 듣곤 하잖아요. 전 딱히 어렵게 용기 내서 작업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싶어서 제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어요.”

청소년기에 겪었던 성 정체성에 대한 불확실성, 성 소수자로서의 인정과 결정에 대한 불안감들, 스스로 나의 존재에 대해 모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나의 작업을 통해 나라는 존재에 몰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19 작업노트 중 발췌-
작가명에 숫자 ‘이십칠’을 사용한 이유가 궁금해요.
홀수에서 느껴지는 불안정함,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숫자라는 점의 애매함이 저를 대변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씨 성을 가진 이름 같기도 해서 재밌게 느껴졌고요. 처음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임의로 27개 설정해 그 모습을 정의하고 이해한다는 의미도 있었어요.
언제부터 작가가 되길 꿈꿨나요?
초등학생 때부터 화가가 꿈이었어요. 학교에서 만화를 자주 그려 친구들이 ‘만화가가 꿈이냐’고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화가’가 될 거라고 콕 집어 답했던 기억이 나요. 중학교 화실 선생님을 통해 미술 작가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쭉 이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죠.

학창 시절에 접한 작품 중 지금의 작가 생활에 영향을 준 게 있다면요?
고등학교 미술부 선생님이 데려가 주신 아트페어에서 나가시마 치히로 Chihiro Nagashima작가의 작품을 본 적이 있어요. 당시 ‘나도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맘이 강하게 일었던 것 같아요. 나가이 고 작가의 <데빌맨>,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에스노 사카에 작가의 <미래 일기> 등 신화적인 사랑 이야기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많은 드로잉 스타일 중 특별히 만화체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오래전부터 모딜리아니와 줄리안 오피의 작품처럼 변형되거나 많은 것이 생략되고 간소화된 이미지를 좋아했어요. 제가 ‘오타쿠’인 점도 분명 영향이 있었겠죠? ‘500m 밖에서 봐도 오타쿠 같다’. 친구들이 자주 하는 말이에요. (웃음) 만화라는 장르는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요. 실제로 중학생 때까진 만화를 많이 그렸고요. 또 예술계 내 퀴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내가 좀 더 확실히 전해야겠구나’ 싶어 만화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도 있어요.

작품에 담으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거군요.
만화는 매우 설명적인 매체예요. 컷만화를 예로 들면 하나의 컷 안에 등장인물이 나오고 그들 간 벌어진 상황이 명확히 그려져 있어요. 마음속 생각까지도 생각 풍선 안에 적혀있죠. 이처럼 어떤 일이나 대상의 내용을 상대방이 잘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는 만화적 요소가 제 목소리를 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2021년 첫 개인전 <너를 봤을 때 내 첫사랑이 떠올랐어>에서는 교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퀴어 현상을 평면 작업으로 담아냈어요. 실제 경험담을 작품에 녹이는 것이 부담되진 않던가요?
가족 외 사람에게 제 개인적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전혀 두려움이 없어요. 자전적인 이야기 혹은 어떤 트라우마를 입 밖에 꺼내면 흔히 ‘용기 있다’는 말을 듣잖아요. 근데 전 딱히 어렵게 용기 내서 작업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싶어 제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어요.

유난히 마음이 가는 작품 이야기를 해볼까요?
힘들면 담배 생각이 난다고들 하죠. 저도 그렇게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어요. 친구에게 배워 학교 화장실, 골목, 낙동강에서 함께 나눠 피웠죠. 냄새가 손에 배면 안 되니 젓가락이나 볼펜으로 담배를 집어 피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낙동강>은 그때의 기억을 담았는데, 왜인지 무척 맘에 들어요. 반 아이들이 성폭력 경험담을 나누는 기억을 그린 <성폭력 피해 경험을 나누는 여고생들>도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예요.

어떤 그림에선 남녀의 신체적 특징을 발견할 수 없기도 해요.
패싱(자신이 선택한 성별로 보이려는 행위)에 오류가 나길 기대하며 그린 그림들이에요. 사회적 관계 맺음 안에서 성별이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그저 개인 대 개인으로 서로를 온전히 바라보길 바라는 맘을 담았죠. 그게 바로 제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랑의 세계’이기도 해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작품에 실어 보내며 이제는 스스로를 이해하게 됐다고 느끼나요?
전에는 ‘나’라는 존재가 혐오스럽고 두렵기도 했어요.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전보다는 확실히 저를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10년 후 모습을 상상해본다면요?
행복한 작가의 삶을 살고 있으면 좋겠어요. 많이 웃으면서.


이십칠 작가는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기획자이기도 해요. 대학 졸업 후, 한 해에만 90여 개의 전시를 관람했을 정도로 호기심의 안테나를 늘 세우고 다니죠. 지금은 작가 활동을 하면서 동료 작가 akemi와 함께 을지로에 있는 전시 공간 파이(@pie.info)를 운영하고 있어요. 전시 관람 인스타그램 계정과 작업 아카이빙 블로그를 따로 운영하는 등 기록에도 열심입니다.
작가 발굴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나요?
파이라는 공간을 꾸려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간 것 같아요. 저도 작가 생활을 하고 있어서 첫 전시까지의 막막함을 잘 알기도 하고요. 소개할 만한 작가가 누가 있을지 나름대로 고민과 공부를 거듭하고 있어요.
기획자일 때와 작가일 때의 이십칠은 서로 다른가요?
비슷한 편이에요. 두 가지 일 모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상하거든요. 기획 일을 할 때 더 신중하고 꼼꼼한 것 같긴 해요. 한 발짝 떨어져 작가와 작품을 바라보니까.

요즘 주목하고 있는 아티스트는요?
일본의 카와우소 수아(@pokopekepapipan)작가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어요. 파이의 개관전을 함께 한 작가인데, 이 작가를 통해 캐릭터 아트의 미래를 보고 있거든요. 올해 다시 한번 소개할 예정이니 기대해주시면 좋겠어요.
작가로서, 기획자로서 시도해보고 싶은 전시가 있다면요?
작가로서는 중·고등학교에서 청소년 퀴어 작업물을 선보이고 싶어요. 기획자로서는 일본에 한국의 작가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네요.

올해 계획 중인 특별한 이벤트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올해의 목표 중 하나가 책을 엮는 거예요. BL(boys love)을 좋아하는 오타쿠를 다룬 인터뷰집이 될 것 같아요. 참, 6월에 세 번째 개인전을 열어요.
주제를 귀띔해준다면요?
앞선 두 번의 개인전에선 청소년 퀴어 문화를 다뤘는데, 이번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세계관과 장면을 차용해 ‘신체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에요.
이십칠이 믿는 ‘기록의 힘’은 무엇인가요?
다니던 중학교 복도 벽에 천경자 선생님의 작품과 함께 선생님의 이야기가 담긴 액자가 걸려 있었어요. 거길 지날 때마다 ‘나도 이렇게 기록되고 싶다’고 깊이 생각했죠. 제가 존재하고 있고, 존재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아줬으면 해요. 남겨진 작품으로, 기록으로 이 세상에 묵직하게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작가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 3

<남겨진 죽음>은 작가 활동의 시작을 알린 전시예요. 대학 졸업 후 일 년간 아무 활동 없이 지내다 공모에 지원했던 공간에서 연락이 왔죠. 기쁘기도, 서럽기도 해서 엉엉 울었어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열게 된 첫 전시라서 그런지 큰 의미로 남아있습니다.

<너를 봤을 때 첫사랑이 떠올랐어>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가졌어요. 제 작업을 SNS를 통해 지켜보시던 전시공간 영영(@exhibition00_)의 디렉터님이 감사하게도 제안을 주셨죠. 먼 곳에서 작품을 보러 와주신 분들이 많아 참 감사한 시간이었어요.

2022 더프리뷰 아트페어 성수에 참여한 3일간 느끼고 배운 게 많아요. 다양한 사람에게 제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직접 들으며 자신감도 충전할 수 있었고요. 올해는 작가가 아닌, 공간 파이 운영자로 행사에 참여해요. 기존에 함께 하던 작가님은 물론, 새롭게 한국에 소개하는 작가님도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들러주세요! 성수동 S Factory D동에서 4월 20일~ 23일까지 열려요.
에디터 최안나
사진 이십칠, 공간 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