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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은 나의 힘, 아티스트 장가노
장가노 작가는 느려요. 작업을 준비하고, 연필과 아크릴 물감으로 캔버스를 채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죠. 하지만 서두를 생각은 없습니다. 일러스트의 수준은 그가 들인 시간으로 결정된다고 믿어요.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게으름뱅이 장가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말했어요. 천천히, 느긋하게.

예전 작업실도 이 근처 아니었나요?
망원동 살다가, 성산동으로 이사 갔다가, 서교동 쪽으로 왔어요.
마포 남자네요? 포털에서 검색하면 울산 출신으로 나오던데요.
울산에서 자랐고 대구에서 대학 생활을 했어요. 딱히 흥미가 붙지 않아 휴학하고 일만 했지만요. 2015년이었나? 친한 형이 서울에서 지내다가 군입대하면 어떻겠냐고 해서 올라왔어요. 그때 처음 자리 잡은 동네가 연남동이었어요. 이후 쭉 그 근처에 살아요.
작가 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올라온 건가요?
거창한 계획은 없었어요. 이런저런 경험 좀 하겠다는 마음 정도였던 것 같아요. 지금도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는 기분은 들지 않아요. 개인 작업과 별개로 일하고 있거든요.

무슨 일이요?
미술 학원 강사예요. 개인적으로 드로잉 클래스도 운영해요. 여기 작업실에서.
직장인이라곤 생각 못 했어요. 출퇴근을 하면서 개인 작업을 병행한다는 건 좀처럼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든 일일 텐데.
부지런하다고요? 장가노라는 이름이 스페인어로 게으름뱅이라는 뜻인데...
스페인어였어요? 한자로 지은 닉네임인 줄 알았어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본명이 ‘장관호’냐고. 저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생각해 봤더니 게으르다는 말이 제일 많더라고요. 일어나면 한 시간 정도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좋아하고. 맞는 얘기 같아서 장가노라고 지었어요.
게으름뱅이라고 하기엔 활동이 참 활발해요. 동아일보 100주년 기념 아트워크에 참여했고, 개인전도 열었죠. 올해는 장띵 작가와 <어반 브레이크2022> 에서 작품을 전시했어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각해보니까 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더라고요. 특히 요 몇 년 사이엔 더 그랬어요. 2020년에 그린 ‘네거티브 낸시’를 기준으로 바뀐 게 많아요. 처음으로 반응이 많이 왔어요. 그 작품을 통해 알게 된 다른 작가들도 있고요. 덕분에 좋은 기회가 종종 주어지는 게 아닌가 싶네요.
‘네거티브 낸시’가 연필로 드로잉 한 작품이었죠? 훨씬 과거에 그린 초기작인 줄 알았어요. 요샌 아크릴화를 많이 그리는 것 같아서요.
예전부터 컬러 작업을 꾸준히 하긴 했어요. 제 그림에 관심을 두는 분들이 연필 작품을 더 좋아하기도 했고, 전부터 해 온 생각도 있어서 사람들에게 잘 보여주진 않았어요.


어떤 생각이었는데요?
명도를 완전히 이해 못 하면 색을 다룰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흑백 그림은 채도가 빠져있어서 자칫하면 개체를 구분 짓기 어렵거든요. 컬러를 활용할 수 없다는 핸디캡을 안고도 좋은 드로잉을 할 수 있다면 나중에 어떤 작업이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직 확신이 서진 않지만, 전보다 성장했다는 느낌이 분명 들긴 해요.
2D 작업 외에 더 시도해 보려는 작업이 있어요?
일단 컬러든 흑백이든 2D 일러스트는 계속 그릴 거예요. 작가의 개성과 드로잉 기법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은 2D니까요. 다만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다루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나도 그림으로 화려한 시퀀스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해요.
특별히 좋아하는 만화가 있나요?
사무라 히로아키가 그린 <무한의 주인>이요. 영생을 얻은 사무라이가 모험을 하는 내용이에요. 초반부 그림이 좀 어지럽긴 한데, 뒤로 가면 갈수록 연출과 작화 스킬이 엄청나요. 우리나라에선 별로 유명한 것 같진 않지만 진짜 멋있는 만화예요. 몇 가지 더하면 <카우보이 비밥>, <아이실드 21>, <빈란드 사가> 같은 작품도 좋고요.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봤나 봐요. 옛날 만화도 많이 알고 있네요.
꿈이 만화가였어요. 애니메이션에도 계속 관심을 가졌어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지만요. 대학생 때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뮤직비디오의 비주얼 작업도 한 적이 있는데 정말 쉽지 않았거든요. 전문적인 기술이 부족한 데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과는 달리 팀 단위로 함께 일해야겠더라고요.
여건만 조성된다면 아직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꿈이네요?
막연한 희망 사항이에요 아직은.


그럼 미래에 대한 기대 말고 현재의 기쁨은 뭔가요? 오늘 당장 아트를 하면서 느끼는 행복이요.
해외 웹사이트에서 게임이나 영화 콘셉트 아트 작품을 보면 터치감이 정말 뛰어나요. 색감도 정말 풍부하고요. ‘이런 건 대체 어떻게 그리는 거지?’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이해 못 했겠죠. 그때 본 이미지들은 3D인 ‘면화’였는데, 당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은 2D 개념인 ‘선화’에 머물렀거든요. 이제는 개념을 이해하고 저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가 온 것 같아요.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해냈어요.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꿈꾸던 영역을 뚫은 거죠. 그럴 때 쾌감이 있어요.
게으를지는 몰라도 끈질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즉흥적이기보단 계획적이고. 집만 봐도 느껴져요. 작업 공간, 클래스룸, 생활 공간을 분명하게 나눠놨어요. 심지어 스탠드형 조명 한 쌍을 방 한쪽에 좌우 대칭으로 뒀더라고요.
하하. 언제 보셨어요?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림 그릴 때도 스스로 만들어 둔 절차와 기준을 꼭 지키려고 해요.
의도한 대로 작품을 완성하는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에너지 소모가 클 듯해요. 쉽게 지칠 수도 있잖아요.
체력도 체력인데, 오래 일하다 보면 ‘멘탈’이 피폐해질 때가 있어요. 가끔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 의심이 들어요. 잘 하고 있는 게 맞는지 궁금하고.
찾아낸 해결책이 있어요?
내가 세운 기준을 믿고 계속 공들여 그리는 방법밖에 없어요. 골인 지점이 없는 직업이잖아요.
작가님의 그림을 모사하고 있다거나, 친구를 태그해서 자극 좀 받으라는 글이 SNS에 많아요. 아마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이겠죠. 언젠가는 작가님이 방금 말한 고민을 할지도 몰라요. 이 인터뷰를 보고 있을 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요즘은 그림만 잘 그린다고 풀리는 시대는 아니라고 봐요. 작품처럼 자신을 매력적으로 표현해야 하더라고요. 저도 많이 생각하는 중이에요. 노력한 만큼 사랑받으면 좋겠어요. 저를 포함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아티스트 모두.

에디터 이재현
비디오그래퍼 Kegan Kim
사진 아티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