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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부스러기를 모으면
아티스트 노재억(@noh.jae.eok)은 ‘내가’ 딛고 선 땅에 밀착해 ‘나를’ 둘러싼 환경을 살핍니다. 새로운 곳으로의 거창한 이동을 꿈꾸거나 반짝이는 주류를 좇기보다 외면받는 자투리에 관심을 더 기울이죠.
오래 살던 동네의 재개발 현장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소멸하는 것이 있다고 그는 말해요. 그 대상은 사물일 수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또 다른 순간일 수도 있죠. 보풀 같은 흔적을 수집하고 ‘드로잉’으로 남깁니다. 붓 대신 싸리비로, 정제한 모양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담은 과정을 통해서요. 반려 고양이가 캔버스 위에 꾹 누른 발 도장조차 작품 일부가 되도록 두는 곳. 질서보단 천연스러운 풍경으로 채운 작업실에서 노재억 작가를 만났습니다.

인스타그램 피드 보니까 요즘에도 붓 말고 색다른 도구를 쓰나 봐요. 경기문화재단과 했던 프로젝트 ‘옆집예술 x 안양’에선 ‘싸리비’를 가장 좋아하는 도구로 꼽은 기억이 나요.
싸리비는 여전히 쓰고 최근엔 ‘수수비’라고 수수로 만든 빗자루를 구했어요. 또 단단한 나뭇가지나 실도 활용해 보고 있어요.
처음부터 ‘그릴’ 목적으로 나온 도구를 쓰진 않네요. 붓이나 연필처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덜 써요. 화구는 어느 방향으로 힘을 주고 빼냐에 따라 내 의도대로 칠할 수 있어요. 그리다 보면 어릴 때부터 학습된 아카데믹한 습관도 남아 있을 텐데 그런 인위적인 표현을 벗어나 보고 싶더라고요.

도구가 원래의 목적을 떠난 거네요. 통제하기 어려운 재료면 어떻게 그려질지 예측하기 힘들 거 같아요.
그릴 때 모션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다양한 도구를 써도 결국 캔버스를 눈으로 보니까 인지하게 돼요. 의식하는 행위를 배제하려고 불을 끈 채 드로잉을 해본다든지, 거리감을 두도록 장대 끝에 도구를 붙여서 그린다든지, 캔버스를 등져본다든지. 최대한 다양하게 움직여 보고 있어요.
왜 인지를 벗어나고 싶은지 궁금해요. 작품에서 ‘작가’라는 자아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거예요?
아뇨. 오히려 ‘나’를 찾고 싶은 거예요. 대상을 그리거나 콜라주도 해봤는데 일회성 표현에 그치는 느낌이었어요. 휘발되는 작업으로 남지 않으려면 ‘내가 하는 진짜 회화는 무엇이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지금은 ‘드로잉’을 활용해서 회화를 연구하는 ‘과정’에 있는 것 같네요.

어느 공간, 어떤 우연을 만나는지에 따라 저는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그래서 외부 환경을 제외하면 ‘나’라는 주체는 무엇인지, 어디 있는 건지 생각할 때가 있어요. 작가님의 작업이 힌트가 될 수도 있겠어요.
하하. 아무래도 저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더라고요. 과정 중에 다양한 시도도 많이 일어나고요. <2022 안양연고작가발굴지원전>에서 선보인 주제 ‘깎아내기 부딪히기 긁히기’도 같은 맥락이었어요. 작업 중에 취했던 모션을 단순한 말로 드러냈죠.
지금까지 공개한 작업물을 보면 ‘기록’, ‘아카이빙’처럼 ‘수집’과 관련된 키워드도 떠올라요. 글, 영상 등 다양한 방식이 있을 텐데 회화로 모을 때 고려하는 점은 어떤 거예요?
서사적으로 접근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나무나 돌, 오브제라고 해서 막 다 회화에 가져다 쓰기보다 그 속에 담긴 맥락을 먼저 파악해요.

서사를 더 풀어서 설명해 줄 수 있어요? ‘내손라주택재개발: 내손동 아카이브’ 프로젝트와 연결되는 지점으로도 보이거든요.
맞아요. 비슷한 접근 방식으로 작업했죠. 의왕시에서 20년 넘게 살았는데, 어느 날 동네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며 시작한 프로젝트예요. 행정가에 의한 기록이 아니라 거주자로서 남긴 ‘동네 아카이브’이기도 해요. ‘재개발’은 획일적인 가치를 올리지만 이웃들에겐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죠. 가구든 집이든 허물어지면 그만인 게 아니더라고요. 생활 쓰레기도 처음부터 쓰레기장에 존재했던 게 아니라 특정한 목적에 의해 태어났고 누군가 사용했기 때문에 시대성이 있잖아요. 다른 작업할 때도 상품이든 자연물이든 규모가 작다 한들 개별적인 이야기나 그 시대가 남긴 역사가 있는지 들여다봐요.
내손동 전시장에서 관객과 직접 호흡하는 시간은 어땠나요? 주민으로 살 때와 달리 작가로 만난 느낌이 다를 듯해요.
오래 살던 동네라 얼굴 아는 사람도 전시장에 많이 와서 반가웠죠. 물론 처음 뵙는 주민도 많았는데, 예상보다 이 마을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어요. 이미 타지로 이사한 분들도 전시장에 많이 와주셨거든요.
프로젝트가 지역의 기록이면서도 개인의 역사가 됐네요. 지금 작업실에 보이는 저 문짝도 내손동에 있던 거예요?
네. 창틀도 그렇고 아직 좀 남아 있어요. 아파트 짓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획일적인 개발은… 답답하고 잘 모르겠어요. 아파트의 위상이 곧 나의 브랜딩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잖아요. 사실 아파트 이름도 마음에 안 들어요. 무슨 티움? 뭔 스테이트? 희한하죠. 미술을 할 때는 나라도 그러지 말아야지 싶어요.

우: 드로잉 모음
아카이빙 방식도 궁금해요. 작품은 제작자를 한 번 통과해서 나오니까 모든 것을 다 담을 순 없을 듯해요. 수집 대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텐데 기록하는 대상의 공통점은요?
버려지고, 소외되고, 목소리를 잃고. 무언가의 뒤에 서 있거나 모서리에 박힌 것.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주된 덩어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 같아요.
소외된 사람 또는 사물을 다룰 때 유의하는 점도 있어요? 저는 정말 조심스러운 태도를 대해야 할 상대를 보면 당사자가 아닌 내가 뭔가를 말해도 될지 고민이 들 때가 많거든요.
똑같이 어렵죠. 그렇지만 일단 다가가서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요. 위선이나 동정으로 번지지 않도록 말이죠. 오히려 아주 원초적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요. ‘나 하나라도 들여다보자’라는 마음으로 작은 것에도 귀 기울여 봐요.

소외된 것을 계속 보려는 이유도 있어요?
보려고 애쓴다기보다는 이제 보이기 시작한 것 같네요. 저 또한 지금을 살고 있어서 동시대성은 벗어날 수 없다고 보니까 역사에 계속 주목해 왔어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 마주하는 울림 있는 순간이 있는데, 가장 감명 깊었던 건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였거든요. 남들이 보지 않는 면을 보는 점에서요. 저도 막연히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할 목적으로 그리고 싶진 않아요.

우: 키워드를 정리한 노트
작품을 화면으로 처음 접했는데 색이나 모양이 타고 남은 재처럼 보였어요. 도구도 일상에서 쓰이는 도구라 소멸해 가는 재료로 소멸을 표현한다고 느꼈어요.
정말요? 나름대로 틀을 깨는 시도를 하면서 재가 되는 느낌을 생각하며 작업했는데 반갑네요.
제가 제대로 받아들였군요. 그렇다면 경기도민으로서 작가님과 생활 반경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네요. 경기도에서 오래 살았다고 들었어요. 비슷한 지역에 계속 머무는 건 역설적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보다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환경을 뒤집고 싶은 욕구가 치솟을 때가 있잖아요.
그렇죠. 오랫동안 경기도 남부에 살았어요. 의왕시나 안양시. 학교도 성남시. 경기도가 막 좋아서 있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계속 살게 됐어요. 뭘 생각하고 뭘 해야 하고 뭘 그려야 되는지 모른 채 다른 곳으로 떠나기보다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아직은.
마음가짐이라니! 예술이 곧 수행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뻔하고 일반적인 얘긴데 내려놓고 나니까 열등감도 화도 줄었어요. 작업실 구해서 아예 작업에만 시간을 전부 쓰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거든요. 전에는 직장도 다녀보고 프리랜서로도 있어 봤어요. 어느 날, 이도 저도 아닐 바에 일을 아예 병행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이 오히려 행복해요.

고양이도 행복의 요소일 것 같아요. 너무 귀엽고 처음 보는 사람이랑도 금방 친해지네요. 사진에 자주 등장했던 친구죠?
맞아요. 제가 고양이 사진 일부러 찍는다고 자주 오해받아요. 그게 아니라 작업할 때마다 옆에 계속 있는 거예요. 인터뷰 덕에 드디어 오해가 풀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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