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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Picks

회화보다 아름다운

 

어떤 영화는 스토리나 OST보다 ‘결정적 한 컷’으로 기억되기도 해요. 조명과 구도, 색채가 호응하며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장면이 완성되죠. 시각적으로 황홀하고 서사적으로 절묘한 영화 속 여섯 장면을 추렸어요.


 

❶

<블레이드 러너 2049>

드니 빌뇌브, 2017
 


K(라이언 고슬링)는 LA 경찰 소속 ‘블레이드 러너’예요. 허가받지 않은 안드로이드 ‘리플리컨트’를 추적하고 폐기하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K 역시 자연 잉태를 통해 태어난 존재가 아닌 공장에서 생산된 리플리컨트예요. 인간에게 멸시받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죠. 그는 사건을 추적하던 중 남녀 리플리컨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아내요. 생식 기능 없이 제조된 그들이 절대 할 수 없는 일. K는 단서를 찾기 위해 리플리컨트 제작사 ‘월레스’를 찾아요. 웅장하면서도 암막한 본사 내부엔 제품 생산에 필요한 각종 정보가 보관되어 있었죠. 비밀스러운 박물관 같은 이곳 입구에서 K는 ‘비밀의 열람’을 청합니다.

 

🎬 Behind The Scene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원작보다 30년 후의 세계를 다뤄요. 그 사이 본편에 등장했던 리플리컨트 제작사 ‘타이렐’은 망했고, 휴머노이드에 대한 반감으로 ‘인간 우월주의’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죠. 이처럼 원작과 후속작 사이 일어난 사건들을 애니메이션 및 단편 영화로 별도 제작해 영화 개봉 시기에 맞춰 공개했습니다. 2022, 2036, 2048년 총 세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데요. 특히 애니메이션 버전은 <카우보이 비밥>의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감독을 맡아 ‘고퀄리티’를 보장합니다. 영화 배급사인 워너 브라더스가 유튜브에 모두 올려두었으니 관람 전에 꼭 먼저 보길 추천해요.
 

<Black Out 2022> / 이미지 출처: Warner Bros.

 


 

❷

<세븐>

데이빗 핀처, 1995
 


축축하고 어두운 도시에 형사 데이비드 밀스(브래드 피트)가 부임해요. 모두가 꺼리는 근무지에 자원한 젊은 경찰이었죠. 은퇴 직전의 베테랑과 한 조가 된 그는 갑자기 발생하기 시작한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합니다. 그리고 곧 기독교의 ‘7가지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라는 범행 의도가 드러나죠. 하지만 범인은 두 형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태연하게 자수합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시체를 숨겨둔 곳이 있다고 말과 함께요. 두 형사는 살인마를 태우고 송전탑이 늘어선 황량한 길을 다급하게 달립니다. 숨막히는 풍경의 끝에 도달하면 지옥도가 펼쳐지리라는 것을 모른 채로.

 

🎞️ Behind The Scene


이름이 나오진 않지만 영화의 무대는 사실상 과거의 뉴욕을 모티브로 한 가상의 도시예요. 사람들은 각박하게 살아가고, 거의 매일 비가 내리는 듯한 음울한 곳이죠. 하지만 실제론 거의 모든 촬영을 미국 내에서 뉴욕과 정반대 쪽에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했어요. 송전탑과 비포장도로가 또렷한 소실점을 연출하는 자동차 주행 신도 모하비 사막 외곽의 황무지에서 찍었고요.
 

이미지 출처: IMDb

 


 

❸

<파리, 텍사스>

빔 벤더스, 1984
 


한 중년 남자가 정처 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자신 때문에 가족이 불행해진다고 생각해 4년 동안 방랑 생활 중인 그의 이름은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 의부증으로 가정을 서서히 파탄 낸 끝에 아내 제인(나스타샤 킨스키)은 아들을 데리고 나가 자취를 감춰버렸죠. 잃어버린 가족을 다시 찾아 나섰을 때 아들은 동생 부부가 돌봐주고 있었어요. 아버지로서 엄마를 되찾아 주기 위해 그는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먼 길을 나서요. 성인 업소에서 겨우 다시 만난 부인에게 그는 속죄를 한 후 아들이 기다리는 호텔 객실 번호를 일러주죠. 트래비스는 녹색과 붉은색이 내려앉은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다 다시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납니다.

 

📽️ Behind The Scene


<파리, 텍사스>는 로드 무비인 동시에 ‘색깔의 영화’이기도 해요. 여러 컬러가 화면을 채우며 서사 전개를 보조하죠. 장면 단위로 영화를 뜯어보면 치밀한 색조 설정이 역시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다워요. 가장 함축적인 색채는 녹색과 적색. 사랑하는 사람과의 분리와 고통은 녹빛으로, 모성에 대한 갈망은 붉은빛으로 표현합니다. 탈진한 채 발견된 트래비스가 눈뜬 병원은 초록 조명이 켜진 곳이었고, 훗날 엄마를 찾아 나선 부자가 붉은 상의를 걸친 것처럼요. 주인공의 마지막 뒷모습을 담은 엔딩 신에서 도시는 녹색과 붉은색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되찾은 엄마의 존재, 그리고 가족을 뒤로하고 다시 사라질 트래비스의 앞날을 이 한 장면으로 모두 이야기하는 듯하죠.
 

이미지 출처: IMDb

 


 

❹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 2006
 


영화가 펼치는 세계관은 끔찍하게 절망적이에요. 지구에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지 18년이나 지난 시점. 곳곳에서 핵전쟁과 가스 테러가 발생하고 무정부주의자들과 정부군의 전투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죠.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런던에 살던 테오(클라이브 오웬)는 전 부인에게 ‘키’라는 여자를 보호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요. 그녀가 임신했다는 이야기와 함께요. 테오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만삭에 이른 여인의 배를 직접 목격해요. 아이를 출산시키고 산모를 지키기 위해 테오는 목숨을 담보로 모험을 시작합니다.

 

🍿 Behind The Scene


임신한 여인은 테오 앞에서 옷을 벗어 배가 부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청결한 산실이 아니라 젖소가 사육되는 축사예요. 성경에 나오는 예수 탄생을 모티프로 한 장소 설정이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는 설정도 동정녀의 몸으로 임신했다는 성모 마리아의 출산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 장면은 서양 미술에서도 회화 및 벽화로 수없이 제작됐어요. <칠드런 오브 맨>에서 아이를 가진 여성의 모습 역시 영화라는 매체를 빌려 표현할 뿐, 구원과 희망이라는 메시지는 그동안의 종교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페데리코 바로치, ‘그리스도의 탄생’ / 이미지 출처: 프라도 미술관

 


 

❺

<카게무샤>

쿠로사와 아키라, 1980
 


본디 신분은 좀도둑, 대역 의뢰인은 당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력자. 미천한 남자(나카다이 타츠야)는 하루아침에 유력한 다이묘 다케다 신겐의 안전을 위한 ‘그림자 무사’로 뽑힙니다. 하지만 ‘진짜’가 죽자 곧장 난세의 구렁텅에 휘말려 버리죠. 살기 위해선 자신을 버리고 타인이 되어야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짜’일 뿐인 그에게 인생은 허무한 쪽잠 같습니다. 남자는 꿈에서 다케다 신겐을 쫓고, 되려 쫓기기도 하는데요. 동경과 공포가 뒤섞여 마음을 짓누르는 동안에도 꿈속 공간은 어쩐지 아름답게 보이기만 합니다. 그에게 세상은 지옥과 천국마저 뒤섞인 알다가도 모를 곳 아니었을까요.

 

📼 Behind The Scene


쿠로사와 아키라는 ‘골치 아픈 천재’였어요. 대단한 예술 영화를 만들지만 제작비를 어마어마하게 들이고, 흥행은 또 보증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일본 내에선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던 중 이미 명감독 반열에 오른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코폴라가 불쑥 제작자로 참여합니다. 둘은 미국의 대형 영화 제작사 20세기 폭스까지 끌어왔죠. 그들이 함께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쿠로사와 아키라의 받는 영향에 대한 보답이자 영화계에 남긴 공헌에 대한 감사였어요. ‘카게무샤의 꿈'처럼 엄청난 세트 제작비가 들어가는 장면 역시 우정 하나 때문에 달려든 제작자와 제작사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죠.
 

쿠로사와 아키라가 프란시스 코폴라, 조지 루카스와 찍은 사진 / 이미지 출처: Akira Kurosawa Info

 


 

❻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4
 


에미(브리지트 미라)는 독일 사회의 가장자리에 선 노동자예요. 청소부로 일하고, 별다른 재산 없이 외로이 지내는 형편이죠. 그녀는 모로코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알리를 우연히 알게 됩니다. 나이, 국적, 인종 등 모든 조건을 뒤로하고 연인이 돼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혼인 신고도 마치고요. 부부가 된 후 에미와 알리는 조촐하게나마 결혼을 자축하고자 히틀러가 자주 찾았다는 식당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종업원은 흑인과 함께 온 나이 든 여자를 은근하게 멸시해요. 겨우겨우 허락받듯 주문을 마치고 둘은 조용히 카메라를 응시합니다. 갑갑해 보이는 룸 안에 갇혀, 히틀러의 망령이 여전히 존재하는 독일 사회에 갇혀서 말이에요.

 

🎥 Behind The Scene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감춰진 이야기도 무궁무진해요. 15일 만에 후다닥 찍은 속성 촬영작이고, 남자 주인공 알리(엘 헤디 벤 살렘)은 사실 전문 배우가 아니라 감독 파스빈더의 남자친구였죠. 또한 레스토랑 신에서 나오는 장소는 세트가 아니라 뮌헨에 실제로 있는 식당 ‘오스테리아 이탈리아나 Osteria Italiana’예요. 히틀러가 단골이었다는 대사도 영화를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의 여자친구였던 에바 브라운의 사진첩에서 히틀러가 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사진이 발견됐거든요.   
 

이미지 출처: National Archives Catalog

 

에디터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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