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s
수린이라는 조각
오늘의 기분은 어떤 모양일까요? 빙긋 웃음이 나는 행복한 기억, 정돈되지 않은 잡념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티스트 수린(@surin.kim)은 내면 깊숙한 곳의 감정과 자기 안의 에너지를 이미지와 조각으로 형상화해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마구마구 뻗어나가지만, 절묘하게 무게 중심을 잡고 굳건히 서 있습니다. 마치 작가 자신처럼 말이에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게 예술의 매력이고, 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껴요.”
-수린-

올해 7월에 첫 개인전 <POWER OBJ>를 열었어요. 관람객이 많이 몰려 전시장 바깥까지 줄 설 정도였죠.
그렇게나 많이 찾아와 주실 줄 몰랐어요. 준비한 술이 동났는데, 불평 하나 없이 작품에 집중하면서 관람을 해주셨죠. 찾아주신 분들 모두 격식있고 젠틀해서 행사 끝나고 ‘이렇게 기 안 빨리는 전시는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어요.
사람들이 몰린 만큼 다른 후기도 여럿 들었을 것 같아요.
전엔 온라인에서만 작업물을 소개해서 그런지 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번 개인전의 소득 중 하나인데, 창작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전시가 더 마음에 와닿고 흥미로웠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어요. ‘나는 인터넷 망령이 아니다’라는 사실 역시 증명한 게 아닌가 싶네요. 참,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제 개인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뜻밖의 광경이었죠.

현실에서 얼굴을 내비치는 게 꺼려지진 않았나요? 개인전인 만큼 작가에게 모든 이목이 쏠렸을 테니까요.
‘신비주의가 과연 유의미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작가가 가진 자산을 활용해야 하는 거죠. 그게 수린이라는 캐릭터든 뭐든. 다행히 작품뿐만 아니라 제 시시콜콜한 일상도 응원해 주시더라고요. 집중력이 흐트러지진 않을지 걱정도 했지만 전혀 문제없었어요. 작품이든, 작업 과정이든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인데, 관심을 받는다는 게 참 기적 같은 일이죠.
전시에서 가장 눈길이 갔던 작품은 역시 가운데 놓인 ‘탑’이었어요. 다보탑과 석가탑이 떠올랐어요.
불국사에 있는 두 탑과 제가 그린 형상이 하나로 결합된 조각이죠. 어릴 때 부모님, 할머니와 사찰에 많이 다녔어요. 탑을 보며 뭔가를 기도하고, 주위를 빙빙 도는 ‘탑돌이’ 광경이 지금도 기억에 선해요. ‘탑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형의 힘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탐구심과 추억의 교차점이 ‘Joyful Korea’에 있어요.
평소에도 작품에 여러 색을 사용하는 편이지만, ‘Joyful Korea’는 특히 화려했어요. 우리나라 탑은 대부분 석재로 만들어 무채색인 데 비해 색동저고리를 걸친 듯해서 신선했죠.
색동저고리 맞아요. 보통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리면 조선 백자처럼 ‘여백의 미’를 이야기하곤 해도,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한국인처럼 화려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탑이라는 오랜 조형물에 층층이 색을 넣으면 근엄하지 않고 팬시하게 보일 수 있겠다는 점도 고려했죠.

탑은 어쨌든 종교 미술이에요. 작품을 구상하면서 불교 색채가 드러나진 않을까 우려는 없었나요?
석가탑, 다보탑은 종교보다 문화라는 포괄적 범주에 넣는 게 옳지 않을까요? 실제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종교적 상징물보단 문화재로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요. 의도하진 않았지만, 종교적 뉘앙스가 있다 해도 별로 상관은 없어요. 평등, 자비를 중요시하는 불교 철학을 좋아하거든요. 괴로움이 너무 많은 지금 사회에서 불교에서 강조하는 가치가 꼭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요.
탑 외의 조각들은 무슨 형태인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평소 스케치를 자주 하면서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파생되는 생각과 감정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끄집어내요. 최종 과정으로 이미지를 3D 프린터로 출력하죠.
3D 프린터에서 처음 작품이 나왔을 때가 기억나세요?
그럼요. 보라색과 회색 두 가지가 나왔는데, 바로 ’아, 이거 색깔별로 다 만들어야지’라고 마음먹었어요. 예상보다 훨씬 예쁘게 나오더라고요. ‘디지털’ 혹은 ‘첨단’이 심어주는 환상이 있으니까 크게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매우 만족스러워서 최후의 만찬처럼 긴 책상에 주르르 진열하고 싶었는데, 그 소원을 이번 개인전에서 실현했죠.

3D 프린터를 도입하고 작업 루틴에 변화는 없었어요?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면 무게중심이 맞지 않더라고요. 현실에서 대조할 수 있는 대상이 없으니까 사전에 짐작도 못 하고. 그래서 중간 절차가 더 생겼어요. 기계는 융통성이 없어서 적정선에서 타협하죠. 컴퓨터가 “이대로 가면 중심 안 맞아서 쓰러질걸?”이라고 피드백을 주면 수정을 시작해요. 참 재미있어요. 창작 과정에서 중요한 순간이기도 하죠. “이러면 곤란해 수린아. 잘 좀 해봐”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인간과 기계가 ‘밀당’ 하는 것 같거든요.
그래도 여전히 아쉬운 점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제작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려요. 기술적 한계로 아직 마감도 거칠죠. 물론 그 맛에 만들기도 하지만, 추후 작업 방향을 좀 틀어볼지 고민 중이에요. 예를 들어 세라믹으로 만들 수 있는 3D 프린터도 있거든요. 또는 표면에 옻칠하는 방법도 있고.
작업이 확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네요?
네. 늘 같은 모습을 보여주긴 싫어요. 그밖에 조각 외에 평면 작업에도 더 집중하고 하고 싶어요. 작품을 만드는 수단이나 방법이 그리 중대한 문제는 아녜요. 어떤 콘셉트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제겐 더 중요해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죠.

애써 만든 작품을 갈아서 의자로 재생산하는 영상을 봤어요. 그 프로젝트에서도 작가님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가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고민 많이 했어요. 하지만 실체가 없어지더라도 그 의미가 없어지진 않는다는 판단이 선 후엔 망설이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불멸이고, 그게 예술의 매력이고, 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낍니다. 물론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는 걸 알아요. 애써 만든 작품을 왜 굳이 부수냐고. 그래도 작품이 실용적인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통해 지속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든 더 갈아버릴 의향이 있어요.
인터뷰 전에 그려본 작가님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네요.
하하. 무슨 생각 하고 오셨길래요. 제가 생각보다 일과 일상이 분리도 안 되고, 작업 외엔 딱히 하는 것도 없어요. 미술관처럼 큰 공간에 가서 다른 사람의 작업을 보고 들으면서 주위를 환기하는 정도? 그래도 요즘엔 의식적으로라도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에 클라이밍을 다니고, 전기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서 푹 자요.

모두 너무 지나치게 건전한 활동인데요. 작업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지 않아요?
요즘 그나마 패션에 재미를 가미하고 있답니다. 솔직히 말하면 대충 주워 입지만, 완전히 큰 옷을 입거나 아예 남자 옷을 사서 하루하루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럼 장기적인 재밋거리는 뭘까요?
지금 PBG 갤러리에 속해있는데, 회사와 모조모조(@mojomojo.seoul) 스트랩 시리즈를 개발 중이에요. 작고 귀여운 작업물을 줄에 연결되어 스마트폰이나 가방에 달 수 있어요. 올해 하반기에 나올 예정입니다. 그리고 내년 상반기엔 두 번째 개인전을 열려고요. 그땐 ‘Joyful Korea’보다 큰 버전의 탑을 꼭 보여드리고 싶어요.

내년까지 정신없이 바쁘겠네요?
해외 일정이 또 잡혀있어서, 아무래도 그렇겠죠?
5년 뒤엔 한국에서 못 뵙는 거 아녜요?
아이고, 저는 한국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지금이 편합니다. 그땐 어떤 작업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보다 5배만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듣고 보니 떠오르네요. 점 볼 때마다 ‘나가는 팔자’라고 하긴 하던데.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