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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보인단 말이야
내용보다 아이템으로 기억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화면을 채우는 미장센으로, 때론 서사 전개의 결정적인 역할로 작품 전체를 휘어잡는 물건 말이죠. 영화 속으로 들어가 슬쩍 훔쳐 오고 싶은 수집 욕 자극 아이템. 집요하게 추적해 온 ‘그 물건들’의 신상정보를 슬쩍 공유합니다.
<블레이드 러너>
아르놀포 디 캄비오 | 시비 더블 올드패션드 글래스

은퇴한 경찰 릭 데커드(헤리슨 포드)는 전 상사에게 연락을 받아요. 외부 행성에서 전쟁에 투입되었던 안드로이드 ‘레플리칸트’가 지구로 잠입했다는 이야기였죠. 근무지에서 탈출한 인간형 로봇을 ‘폐기’하는 ‘블레이드 러너’였던 그는 다시 레플리칸트를 쫓아야 합니다. 추적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집에서 사진을 분석하면서 데커드는 각진 글라스에 위스키 조니워커 블랙을 따라 마셔요. ‘술빨’ 덕분이었을까요. 그는 사진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합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에 등장하는 위스키잔은 이탈리아의 글라스 웨어 회사 ‘아르놀포 디 캄비오 Arnolfo Di Cambio’의 ‘시비 컬렉션 Cibi Collection’ 제품이에요. 디자이너는 이탈리아의 건축가 씨니 보에리 Cini Boeri죠. 이 잔은 블레이드 러너 팬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해 드니 빌뇌브가 감독을 맡은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다시 나올지 관심이 집중됐어요. 하지만 나이 먹은 데커드는 아쉽게도 다른 글라스를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술은 여전히 조니워커였지만요.

수집 난이도|☆
브랜드는 영화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 아예 ‘블레이드 러너 글라스’라는 웹페이지를 만들어 운영 중이에요. 해외 배송에 드는 시간만 참아낸다면 누구나 비 오는 날의 고독한 데커드'가 될 수 있습니다.
가격 난이도|★★☆
공식 판매처에서 배송비 제외 약 14만원에 판매 중입니다. 종종 보다 저렴한 제품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기도 하지만, 모조품이 많아 정식 판매 루트로 구매하길 권해요.
<500일의 썸머>
놀 | 바르셀로나 체어

연인 썸머(주이 디샤넬)를 떠나보낸 톰(조셉 고든 래빗)은 모든 걸 잃은 듯 허우적대요. 직장에선 망가진 모습만 보이고,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죠. 동생(클로이 모레츠)에게 “오빠는 사랑하는 사람의 보고 싶은 모습만 보고 있어.”라는 충고를 들은 톰은 드디어 마음을 정리합니다. 썸머를 만난 지 5백일이 되던 날, 새로운 직장 면접을 앞둔 그는 다른 지원자와 이야기를 나눠요. 그녀의 이름은 가을이라는 뜻의 ‘오텀’이었죠. ‘바르셀로나 체어 Barcelona Chair’에 앉아 있는 톰을, 오텀은 소파에 앉은 채 바라봅니다. 우연하게도 그녀의 옆자리는 비어있었죠.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에선 면접 대기자를 위해 놓인 의자로 슬쩍 나오지만, 사실 족보 있는 클래식 가구예요. 무려 1백여 년 전에 독일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가 디자인했죠. 1929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 독일관에 배치할 목적으로 만들어 ‘바르셀로나 체어’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500일의 썸머> 외에도 여러 영화에 소품으로 활용됐는데요. <007 카지노 로얄>, <아메리칸 사이코>, <올드보이>에서도 동일한 디자인의 의자를 볼 수 있습니다.

수집 난이도|★
미국 가구 회사 ‘놀 Knoll’에서 생산한 상품이 오리지널이에요. 국내에선 공식 수입원을 통해 판매 중이라 구하기 어려운 가구는 아녜요.
가격 난이도|★★☆
제작사는 대부분 공정을 손으로만 소화한다고 이야기해요. 다만 핸드메이드라는 ‘프리미엄’을 따라 가격도 덩달아 ‘저세상 프리미엄’. 정식 판매처에서 구매 시 약 1천만원을 들여야 이 의자를 수집할 수 있어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태그호이어 | 프로페셔널 1000

‘한탕 사기’로 월 스트리트를 뒤흔든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시계를 차고 있습니다. 그의 사기 인생이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시계는 달라지죠. 금융업에 뛰어든 초년생 시절엔 세이코 저가 모델을 차지만, 돈에 취하는 시점부터 태그호이어로 ‘점프’를 뛰어요. 시계 컬러 역시 점점 금빛으로 바뀌고요. 회사 규모를 키우며 한창 사기를 치던 시기에 그가 두른 시계는 ‘태그호이어 프로페셔널 1000’. 그는 하다못해 이 시계로도 사기를 칩니다. 직원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던 중 금으로 만든 4만달러짜리 시계라며 투척하지만, 사실 도금한 1천달러짜리 모델이었죠. 겉모습만 금으로 치장한 시계와 인생. 둘은 묘하게 닮았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프로페셔널 1000은 1979년 출시된 다이버 워치예요. 브랜드의 유명 모델인 ‘아쿠아레이서’의 전신으로 보면 되죠. 영화에서도 묘사하듯 대단한 시계는 아니었어도 브랜드의 역사에선 둘도 없는 복덩이였어요. 1980년대, 재정난에 빠진 회사를 먹여살린 제품이 바로 이 시계였거든요. 태그호이어가 지금처럼 번듯한 위치에서 만드는 물건보단 어쩐지 사연 많은 옛 시계를 콜렉팅 박스에 채워 넣고 싶어요.

수집 난이도|★★★☆
태그호이어 프로페셔널 시리즈는 생각보다 쉽게 구할 수 있어요. 즉, 판매량이 많아 세계적으로 중고 물량이 넉넉하단 뜻이죠. 다만 영화에 나온 ‘프로페셔널 1000 금장 버전'은 일반 스틸 모델보단 찾기 힘든 편이에요. 40년 넘은 연식 때문에 도금이 벗겨진 것도 많으니 상태를 꼼꼼하게 살펴봐야 해요.
가격 난이도|★★☆
‘보급형 롤렉스’로 포지셔닝 하려던 시계라서 애초에 출시가가 높지 않았어요. 그리고 태그호이어 팬들에겐 의미 있을 모델이지만, 시계 역사 전체를 두고 보면 ‘최초’ 혹은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한 헤리티지도 없어서 중고가에 별다른 프리미엄도 붙지 않죠.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어도 대략 50~60만원 선이면 손목에 얹을 수 있습니다.
<화양연화>
파이어킹 | 제디트 레인레이 컵&소서

이웃 사이였던 주모운(양조위)와 소려진(장만옥)은 배우자의 외도를 눈치채요. 둘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의 부인과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죠. 그 자리 이후 상실감을 공유하는 동시에 복잡한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파이어킹 Fire-King 찻잔에 담긴 뜨겁고 향긋한 음료를 천천히 음미하는 것처럼, 감정과 도덕의 경계 앞에서 머뭇머뭇하다가도, 두 남녀는 서로를 조심스럽게 원합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파이어킹은 미국 식기 브랜드 ‘앤커 호킹 Anchor Hocking’ 산하 제품 라인이었어요. 아시아 문화권에서 보석 취급을 받은 ‘옥’에서 착안해 1940년대부터 생산했고, 홍콩, 일본 등으로 역수출되어 20세기 중후반에 유행했어요. <화양연화>에서 오랜만에 재등장한 이 찻잔은 1960년대 홍콩이라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수집 난이도|★★
국내외 그릇 콜렉터나 편집숍을 통해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어요. 무려 1950~60년대 제품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요. 미국에선 생산을 중단했지만, 2011년부터 일본에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해 예전 ‘감성’ 그대로 컵과 접시 등을 만들죠. 영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문양의 제품은 판매하고 있진 않아도 그에 못지않게 영롱한 컵을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어요.
가격 난이도|★★
‘Made In USA’ 오리지널 빈티지 모델의 경우 7~10만원 정도의 가격으로 거래돼요. 파이어킹 재팬에서 생산 중인 새 제품은 한 세트에 약 8만원 선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베이비 드라이버>
아이씨! 베를린 | 파레러 클라우스

은행 강도단의 전담 드라이버 베이비(안셀 엘고트)는 이명증 때문에 언제나 이어폰을 끼고 있어요. 음악으로 귀를 틀어막고도 추격을 따돌리며 동료들을 현장에서 퇴출시키는 ‘1급 특송 기사’죠. 주인공이 빼놓지 않는 또 다른 아이템은 선글라스. 줄곧 눈을 가려 표정을 감추고, 세상과 단절한 듯한 캐릭터의 성향을 암시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글라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이씨! 베를린 ic! berlin’의 제품이었어요. 검은 렌즈 뒤에 조용히 숨어 있던 그는 레스토랑에서 만난 점원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 이 선글라스를 스스로 벗어 내립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아이씨! 베를린’은 1997년 독일에서 설립된 브랜드예요. 가볍지만 부러지지 않는 안경을 목표로 하죠. 나사를 일절 쓰지 않는다는 점도 제품의 특징. 의도한 사항이었는진 모르겠지만, 재미있게도 영화에 나온 선글라스의 모델명 ‘파레러 클라우스 Fahrlehrer Klaus’에서 파레러는 독일어로 ‘운전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수집 난이도|★★★
해당 모델은 단종되어 브랜드 웹페이지에서 더는 구매할 수 없어요. 국내에선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만 드문드문 매물이 있고, 새 제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격 난이도|★★★
아이씨! 베를린은 60~90만원대 제품을 주로 내놓는 고가 브랜드예요. 파레러 클라우스 역시 중고인데도 불구하고 50만원대에 매물이 올라올 만큼 ‘끗발’이 있습니다.

